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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내 삼림개발 사업을 추진하던 근위기병사단 출신의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1853~1931)는 러일이 충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일 강경책인 ‘신노선’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구리노 신이치로 주러 일본 공사는 베조브라조프에 대해 “대단한 야심가였고, 게다가 언변이 좋아”서 여러 “황족의 신용을 얻고 니콜라이 폐하와 접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적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02년 1월 말 영·일이 동맹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러시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 동맹은 극동에서 러시아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두 나라가 던진 ‘강력한 견제구’였다. 일본과 갈등 수위를 낮추려면,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이어지고 있는 만주 점령을 멈춰야 했다.
    러시아군의 만주 철병 기한을 정한 러·청 합의가 이뤄진 것은 동맹이 체결된 지 석달 뒤인 1902년 4월8일이었다. 러시아는 이날 체결된 만주철군협정 2조를 통해 6개월 뒤인 10월8일까지 셩징성(현 랴오닝성)의 서남부와 랴오허(요하) 지역, 1년 뒤인 1903년 4월8일까지 셩징성의 나머지 지역과 지린성, 1년 반 뒤인 1903년 10월8일까지 헤이룽장성에서 철군하기로 약속했다.
    만주 철군을 결심하고 나니 걱정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큰 우려는 극동 개발의 ‘생명선’이 되어야 할 동청철도와 남부 지선(다롄~하얼빈)의 안전, 두번째는 한반도의 운명이었다. 이대로 만주에서 군대를 빼면, 이웃한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히 축소될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주한 러시아 공사는 3월2일 고종과 만나 “한국 조정이 근래 러시아에 대해 교정(交情·우호의 정)이 냉담한 경향이 있다”고 쏘아붙였다. 러시아는 분명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다시 등판한 것은 1년 전 일본을 상대로 ‘한반도 중립화’ 교섭을 시도했던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주일 러시아 공사였다. 그는 8월2일 블라디미르 람스도로프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의 국내 정치는 완전히 해체되고,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부가 없다”며, 일본은 “기가 약한 한국 황제를 을러대어 그가 체념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게 하려는 음모”를 부단히 꾸미고 있다고 적었다. 그렇게 되면, “수년 후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완전히 확립했다는 기정사실을 승인하든지, 아니면 이 나라를 두고 일본과 무력 충돌을 결단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철군하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한반도를 최소한 ‘중립국’으로 묶어 놔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다만, 이 구상에 대해 일본이 한번 ‘퇴짜’를 놓았던 만큼, 이번엔 미국을 끼워 넣은 3자 협정을 맺으려 했다.



    호러스 알렌(1858∼1932)은 개화기 조선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1884년부터 1905년까지 무려 21년 동안이나 한국에 살며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고종에 대해 여러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무렵 미국의 주한 공사는 갑신정변(1884) 때 ‘청년 세도’ 민영익(1860~1914)의 치명상을 치료해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 호러스 알렌(1858~1932)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관찰해 온 대한제국의 미래에 대해 극히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가 5월31일 국무성으로 보낸 장문의 기밀 전문은 1989년 미 하와이대학이 간행한 ‘한국-미국 관계’(Korean-American Relations) 3권의 171~172쪽에 수록돼 있다.
    “실질적으로 서울에는 정부가 없다(There is practically no Government in Seoul). 대신들도 국장들도 누구 하나 황제의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작년의 흉작으로 기근이 생겨 수천명이 기아선상에 있고 수백명이 죽었는데도 황제는 가장 사치스럽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려 한다. 관직 판매는 저주가 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이 오로지 황제에게 있다.”
    알렌은 이 우울한 글을 “현재 혼란은 ‘외부의 간섭’으로 조만간 끝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이 너무나 필요로하는 ‘지도의 손길’을 제공할 것”이란 섬뜩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알렌이 볼 때 한국을 ‘간섭’해 ‘지도’하게 될 외국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임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일 두 나라를 설득해 한반도를 중립화하겠다는 이즈볼스키의 구상이 통할 리 없었다.
    앞뒤가 막힌 꺼림칙한 상황 속에서 1902년 10월로 예정됐던 러시아의 1차 철군이 실행됐다. 그러자 만주에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선 안 된다는 ‘강경론’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대한제국의 압록강 일대에서 삼림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근위기병사단 출신의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1853~1931)라는 인물이었다.
    러시아가 이 지역 삼림개발 이권을 손에 넣게 된 것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아관파천 때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상인 율리 브리네르는 1896년 9월9일 조선 정부와 ‘조선목상회사’(朝鮮木商會社)를 만드는 협약을 체결했다. 앞으로 20년 동안 한반도 최대의 삼림 지역인 두만강·압록강 일대와 울릉도에서 목재 개발권을 확보한 것이다. 니콜라이 마튜닌 전 주한 러시아 공사 등을 통해 이 사업을 알게 된 베조브라조프는 1898년께부터 황제 니콜라이 2세를 향해 브리네르의 삼림 이권을 사들여야 한다는 청원을 이어갔다. 결국, 니콜라이 2세가 이 안을 승인하며 사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베조브라조프가 니콜라이 2세의 명을 받고 극동 시찰에 나선 것은 러시아의 2차 철군 기한을 앞둔 1903년 1월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저서 ‘러일전쟁-개전과 기원’에 따르면, 베조브라조프는 이때 일본과 전쟁을 피하려면 극동에 병력을 강화해 상대가 전쟁을 단념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청국 주재 무관인 콘스탄틴 보가크(1859~1923)와 만났다. 와다는 이 만남을 통해 베조브라조프가 보가크에게 설득됐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의기투합한 두 인물은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니콜라이 2세와 만났다. 보가크는 5월8일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만주 문제의 발전에 있어 1902년 3월26일(서력 4월8일) 조약의 의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극동에서 전쟁을 막는 것은 제1급의 국가적 대사”라며 “이를 달성할 제1의 수단은 양보 정책을 중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지난해 4월8일 청과 맺은 철군 협약을 ‘양보’라고 규정하며 지키지 말라고 조언한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베조브라조프였다. 그는 러시아가 극동에서 확보한 왼쪽 날개인 블라디보스토크와 오른쪽 날개인 뤼순 사이에 자리한 압록강의 ‘전략적 의미’를 강조했다. 이 지역의 삼림 개발을 위해 만든 목재회사를 활용해 일본의 만주 진출을 막기 위한 ‘방벽’을 구축하자는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니콜라이 2세가 참석한 5월20일 특별협의회를 통해 “조선에서 날로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축을 세우기 위해서 압록강 유역 양안에 목재 개발 회사를 세운다”는 러시아의 ‘신노선’이 확정됐다.



    무린암은 교토에 자리 잡은 일본의 ‘원로’ 야마가타 아리모모의 별장이다. 1903년 4월21일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등 두 원로와 가쓰라 다로 총리,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이 모여 향후 일본이 취해야 할 외교 방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무린암 누리집 갈무리


    일본은 초조한 마음으로 4월8일로 예정된 2차 철군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이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던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4월21일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두 원로와 교토에 있는 야마가타의 별장인 ‘무린암’에서 만났다. 이날 4인 회의를 통해 만주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러시아와 협상하되, “어떤 간난(艱難·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국을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到底??をも避くへからす)는 엄혹한 현실 인식이 공유됐다.
    일본이 압록강 방벽 구축을 위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3월 말께부터였다.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 공사는 3월27일 고무라에게 러시아가 1896년 확보한 삼림개발 특허 사업을 “착수한다”는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에 알려왔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의도가 단순히 ‘나무만 베자’는 게 아님은 너무나 분명했다. 하야시는 5월3일 전문에선 “러시아가 의주 방면에서 (허가 지역 밖인) 백마산의 벌목을 개시하고, 이 사업을 위해 용암포(압록강이 서해로 이어지는 하구에 자리한 항구)에 토지를 매입하여 공사를 시작했다”면서 “표면상 벌목회사의 사업이라고 하지만 기실 러시아 정부의 사업임을 의심한다”고 보고했다. 이는 매우 정확한 분석이었다. 러시아의 진정한 의도는 러시아 병사와 중국 마적을 삼림회사 직원들로 위장시켜 압록강 유역에 배치한 뒤, 이 지역에 일본의 만주 진출을 차단하는 ‘군사적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러·일의 정면충돌을 앞당긴 이른바 ‘용암포 사건’이 시작된 것이었다.



    오야마 이와오(1842~1916) 일본 참모총장은 1903년 6월22일 ‘조선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문서에서 조선 문제를 이대로 방치하면 러시아가 “조선반도를 점유하는 데 3~4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칼날이 우리의 옆구리를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일본은 이제 결단해야 했다. 오야마 이와오 참모총장은 6월22일 제출한 ‘조선 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서’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방관하면 “3~4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반도가 저들의 영유로 귀속되는 일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칼날이 우리 옆구리를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고무라는 이튿날 어전회의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이 위기를 피하려면 “지금 러시아와 직접 교섭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섭이 실패하면, 남는 선택지는 결국 전쟁이었다.



    러·일 갈등이 고조되던 1903년 6월1일 도미즈 히론도 등 도쿄제국대학에 소속된 7명의 박사들이 가쓰라 다로 총리를 방문해 대러 강경론을 주장했다. 이들이 제출한 건의서는 ‘도쿄니치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에 전문이 공개됐다. 그러자 국한문 혼용체를 쓰던 ‘황성신문’이 이 내용을 7월7일부터 사흘에 걸쳐 번역해 보도한다. 이어 10일엔 현재 대한제국의 신세가 “도마 위의 고기”와 같다는 처절한 논평을 내보내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중간에 낀 대한제국은 절망했다. 황성신문은 7월10일 사설에서 “도마 위의 고기처럼(如俎上之肉) 좌우에서 씹어 삼켜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피할 수 없으니 남몰래 두렵다. 오호, 그것이 슬프다”라고 외쳤다.




    길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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